LEET · 언어이해

2026 LEET 언어이해 19-21

Arbbrief Editorial2026년 5월 2일·28분 읽기·무료 공개
2026 LEET 언어이해 19-21Photo · Arbbrief Editorial

성경은 가죽을 위해 있었다

표면 아래의 시험

표면적으로 이 지문은 유럽에 유학 중인 한 동양인 청년의 소외에 관한 짧은 서사이다. 그는 한 노파를 본다. 노파는 성경을 늘 부둥켜안고 있어 사람들에게 ‘수호성녀’라 불리지만, 정작 성경을 펴서 읽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청년은 노파를 서구 종교가 한 문화의 살처럼 깊이 결합된 모습의 표상으로 보고, 친구 H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두 입장이 부딪치고, 청년은 자신을 ‘문화차별론자’라 자조한다.

이 표면을 들추면 작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작품은 노파의 한 가지 행동(성경을 안고 있음)에 대해 세 개의 서로 다른 해석 층위를 차례로 쌓아올린 다음, 마지막에 가서 그 셋을 모두 무너뜨린다. ㉠에서는 H의 ‘고행’이라는 종교적 해석과 청년의 ‘서구 전통의 살아있는 표상’이라는 문화적 해석이 대립한다. ㉡에서는 청년의 해석이 강화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난다. ㉢에서는, 노파 자신의 입을 통해, 그 모든 해석이 외피였음이 드러난다. 노파는 성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성경 표지의 가죽은 사십 년 전 사고로 죽은 애인의 피부였다. 성경은 가죽을 위해 있었다.

세 문항이 공동으로 시험하는 것은 바로 이 외피와 알맹이를 가르는 능력이다. 어떤 표지가 보일 때 그것을 표지로 읽을 것인가, 사실로 읽을 것인가. 어떤 행동을 어떤 동기에 귀속시킬 것인가. 어떤 장면을 어떤 주제 의식에 대응시킬 것인가. 모든 함정은 잘못된 자리에 귀속을 옮겨두고 그것을 그럴듯한 표면으로 도금한다.

작품이 짓는 세 층의 집

이 작품의 설계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려면, 노파가 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 대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에서 그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햇볕 속에 앉아 성경을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노파 자신이 아니라, 노파를 둘러싼 두 사람의 해석이다.

H의 해석은 단순하다.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고 성경을 늘 끌어안고 있는 노파. 이것은 종교적 고행이며 그래서 그녀는 성녀이다. 성경의 내용은 읽히는 것인데 노파는 그것을 읽지 않으니 좀 이상한 성녀이지만, 어쨌든 종교적 헌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노파는 정리된다.

청년의 해석은 정반대 방향에서 노파를 더 두껍게 만든다. 그에게 노파의 성경은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있는 물건, 발톱에 긁히면서도 손때가 올라간 고양이 같은 것이다. 종교란 합리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한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살아있는 무엇이다. 그래서 다른 문화에서 온 자신은 영원히 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가 자신을 ‘문화차별론자’라 부르는 것은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니다.

이 두 해석은 한쪽이 인간의 보편성에 기댄다면 다른 쪽은 문화의 특수성에 기댄다. 작품은 둘이 부딪히는 자리를 만들어둔 다음, ㉡에서 청년의 손을 들어주는 척한다. 노파가 떨어뜨린 성경을 그가 주워 건네자, 노파는 거칠게 그것을 낚아채고 두려움과 미움의 표정으로 그를 본다. 청년에게 이 장면은 자신의 가설(서구의 신성한 영역에서 자신은 배제된다)을 확증하는 사건처럼 읽힌다. 그래서 노파의 사과 한마디, ‘외국 학생’이라는 호명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다. 외국 학생이라는 호칭 자체가 그의 외부성을 다시 한번 도장 찍는다.

그러나 ㉢에서 작품은 자신이 ㉡까지 쌓아올린 모든 해석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노파가 성경을 거칠게 빼앗은 것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다. 종교적 헌신 때문도, 문화적 폐쇄성 때문도 아니다. 그 가죽이 죽은 애인의 살이었기 때문이다. ㉠과 ㉡에서 청년이 본 모든 광경(부둥켜안음, 사람 기피, 격렬한 낚아챔, 두려움과 미움)은 종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의 표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종교의 외피 아래 사십 년 동안 숨긴 자의 표지였다.

이 반전이 단지 충격적인 결말이라면 작품은 여기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에서 격돌한 두 입장 가운데 어느 쪽도 노파의 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 즉 진실은 H의 보편론과 청년의 특수론을 모두 초과하는 자리에서 솟아오른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노파가 평생 사수한 사랑은 H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모두 같다’는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잃고 사십 년을 버틴 구체적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청년이 말한 것처럼 서구 문화에 갇힌 무엇도 아니다. 작품은 두 번 부정하면서, 새로운 항(인간적 동기로서의 사랑)을 연다.

청년이 노파의 성경을 ‘살아있는 물건’이라 부른 비유는 ㉢에 이르러 아이러니한 진실로 변모한다. 그것은 정말로 한 사람의 살이었다. 가장 멀리 빗나간 듯한 비유가 가장 정확한 사실이었던 셈이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21번을 풀 수 없다.

세트의 단 하나의 축

세 문항이 공동으로 묻는 단 하나의 판단은 귀속의 정확한 자리를 찾는 일이다. 어떤 표지가 어떤 사실을 가리키는가. 어떤 행동이 어떤 동기에서 나오는가. 어떤 사건이 어떤 서사적 기능을 수행하는가. 어떤 장면이 어떤 주제 의식에 대응하는가.

이 모든 질문은 결국 같은 형태이다. A는 B에 귀속된다라는 명제에서, 출제자는 한쪽 항을 슬쩍 옮긴다. 옮긴 자리가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같은 글의 다른 곳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도금한다. 그 결과 선지는 지문 안의 어휘로 가득하지만 그 어휘들이 가리키는 사태는 지문 바깥에 있다.

작품의 진실이 노파의 행동을 그릇된 동기에서 올바른 동기로 옮기는 일이었듯, 세트의 정답을 찾는 일은 선지가 옮긴 귀속을 다시 옮겨놓는 일이다. 작품과 시험은 같은 운동을 한다.

19번: 외피의 종류들

이 문항이 측정하는 것은 소설의 세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질문의 변주가 다섯 번 반복된다. 이 진술은 어떤 외피에 속고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외피는 비유이다. 청년은 노파의 성경을 고양이처럼 애완한다고 말하면서 한 줄 뒤에 고양이를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비유는 처음부터 자기가 비유임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한 선지는 ‘처럼’이라는 한 글자를 떼어내고 노파가 고양이와 시간을 보냈다고 진술한다. 이 한 글자의 누락이 비유를 사실로 만든다. 본문에서 고양이는 성경에 들러붙은 비유적 술어이지 노파의 일상에 등장한 동물이 아니다. 비유 표지를 의식하지 않을 때 비유는 사실로 변신한다.

두 번째 외피는 동기이다. 한 선지는 노파가 애인이 죽은 슬픔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노파가 늘 성경을 끌어안고 있다는 표면적 사실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러나 ㉢에서 노파 자신이 “나는 성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라고 명시적으로 부정하므로, 이 귀속은 작품의 한복판에서 직접 봉쇄된다. 함정의 정교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신앙과 사랑은 둘 다 성경을 부둥켜안는 행동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동기이다. 다만 한쪽은 작품 안에서 명시적으로 부정되고, 다른 한쪽은 명시적으로 긍정될 뿐이다.

세 번째 외피는 사건의 성격이다. 한 선지는 청년과 H의 교류가 노파의 행동에 대한 ‘논쟁’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을 자세히 읽으면 청년은 H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점을 설명하자면 많은 시간이 들리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침묵은 논쟁의 정반대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작품은 이렇게 두 사람이 알게 되었다고 못 박는다. 두 사람의 교류는 논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쪽의 침묵 위에서 시작된다.

정답은 다른 종류의 외피를 검사한다. ㉢에서 H는 노파의 임종 고백을 전달하는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라는 한 어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라는 거야’는 H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다시 전한다는 표지이다. 노파의 임종은 H가 직접 본 사건이 아니다. 그는 동숙자들에게서 그 자리의 일을 들었고, 들은 것을 편지로 청년에게 전한다. 정답은 이 두 단계의 전달, 즉 전해 듣고 다시 전함을 정확히 짚는다. 이 외피는 매력적인 오답들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다. ‘전해 들은 말을 전하였다’는 표현은 평범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작품에서 외피의 문제는 늘 가장 평범한 자리에 숨어 있다. 노파의 성경이 그렇듯이.

20번: 기능의 귀속

이 문항은 ㉠·㉡·㉢ 세 단위 사이의 서사적 관계를 묻는다. 표면적으로는 구조 파악 문항이지만, 실제 연산은 한 단계 더 깊다. ㉢이 ㉠과 ㉡에 대해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이 모든 선지의 정오를 가른다.

가장 매력적인 두 오답은 ㉢이 H의 의문을 심화시키거나 ㉡의 갈등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두 진술이 동시에 매력적인 이유는 ㉢이 가져오는 정보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노파가 사십 년 동안 사람들을 속였고 죽은 애인의 가죽을 성경 표지로 만들어 늘 안고 다녔다는 진실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히 충격을 심화시킨다. 그러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충격의 심화와 의문의 심화는 다르다. 충격적 정보는 그 자체로 새 의문을 일으키기보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을 푼다. 왜 노파는 사람을 만나기를 싫어했는가, 왜 성경을 한 번도 놓지 않았는가, 왜 청년이 성경을 건넸을 때 그토록 격렬하게 반응했는가. 이 모든 질문이 ㉢에서 한꺼번에 해소된다. 갈등 역시 마찬가지다. ㉡에서 노파의 적대적 표정이 만들어낸 긴장은 ㉢에서 그것이 비밀 발각의 공포였음이 드러나면서 완화된다.

심화/해소, 강화/완화는 정반대 방향이지만 같은 키워드(이 경우 노파의 행동·표정·고백) 위에서 일어난다. 출제자는 같은 키워드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기대어 방향을 슬쩍 뒤집는다. 정답을 고르는 사람은 이 방향이라는 좌표를 명시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정답이 가리키는 기능은 복선이다. ㉠에서 노파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 것, ㉡에서 성경을 격렬하게 낚아챈 것은 그 자체로는 종교적 고행 또는 문화적 적대로 해석되었지만, ㉢의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 되돌아보면 두 장면 모두 비밀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자의 행동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사람을 멀리한 것은 가까운 사이가 되면 비밀이 위험해지기 때문이고,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가죽이 떨어지면 누가 만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 ㉡에서 청년과 독자가 본 광경은, ㉢이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이것이 복선의 정확한 정의이다.

여기서 인지적 노력의 정확한 형태가 드러난다. 복선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 아니다. 복선은 과거를 향한 재해석이다. ㉠과 ㉡을 처음 읽을 때는 그것을 복선이라 부를 수 없다. ㉢에 도달한 후에 비로소 ㉠과 ㉡이 복선이 된다. 정답은 이 시간의 역전을 정확히 포착해야만 도달된다.

21번: 두 방향의 분리

이 문항은 보기의 비평적 견해를 작품에 적용한다. 보기는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는데, 그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이 한 문장에 겹쳐 있다. 한쪽은 서구적 보편성을 특수한 것으로 상대화하는 일이고, 다른 쪽은 서구적 기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적 보편성을 탐색하는 일이다. 이 둘은 함께 묶여 있지만 서로 다른 운동이다. 첫째는 빼는 일이고(서구=보편이라는 등식의 해체), 둘째는 더하는 일이다(서구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보편성의 발견).

작품의 결말에서 노파의 사랑이 밝혀질 때, 이 사랑은 둘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답은 후자이다. 노파의 사랑은 기독교적 전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잃고 그를 자기 곁에 두기 위해 사십 년을 견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서구만의 것도, 비서구만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작품은 이 사랑을 통해 인간적 보편성을 탐색한다.

문제의 오답은 노파의 사랑을 정반대 방향에 귀속시킨다. 그것은 인간적 보편성을 서구의 특수한 문화적 전통에 불과한 것으로 상대화한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두 개의 오류를 한꺼번에 저지른다. 첫째, 작품이 상대화하는 것은 서구적 보편성이지 인간적 보편성이 아니다. 인간적 보편성은 오히려 작품이 새로 세우는 것이지 허무는 것이 아니다. 둘째, 노파의 사랑이라는 사례가 향하는 자리는 상대화가 아니라 탐색이다. 보기 안에서 두 방향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 이 함정의 정교함을 만든다. ‘상대화하는 한편…탐색하려는’이라는 한 문장 안에서 두 방향이 합쳐지면, 작품의 한 장면을 어느 쪽에 둘지의 분별이 흐려진다. 정답을 고르는 사람은 이 한 문장을 두 개의 별도 운동으로 분리해야 한다.

이 함정이 보여주는 것은, 보기가 제시한 비평 프레임이 단일하지 않고 두 갈래로 갈라질 때 작품의 어느 장면이 어느 갈래에 속하는지를 매번 명시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갈래만 의식한 채 다른 갈래를 놓치면, 그 놓친 자리에 함정이 들어선다.

함정의 세 가지 문법

세 문항을 가로지르며 반복되는 오답 설계의 공통 문법을 셋으로 추출할 수 있다. 이 셋은 이 세트 바깥에서도 작동한다.

첫째, 비유 표지의 탈락이다. 한국어에서 ‘처럼’, ‘같이’, ‘듯이’, ‘마치’ 같은 단어가 비유를 사실과 구별해준다. 이 표지가 출제자의 손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면 비유는 사실로 변신한다. 변신을 막는 방법은 단 하나, 비유 표지를 의식적으로 호명하는 것이다. 본문이 ‘고양이처럼’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영원히 ‘고양이처럼’이지 ‘고양이’가 될 수 없다.

둘째, 방향 술어의 가역적 위장이다. 어떤 사건이 의문을 일으킬 수도, 풀 수도 있다. 어떤 사실이 갈등을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있다. 어떤 동기가 행동을 신앙으로 이끌 수도, 사랑으로 이끌 수도 있다. 정반대 방향이 같은 사건·사실·동기 위에서 작동할 때, 출제자는 진짜 방향을 가짜 방향으로 슬쩍 바꿔놓는다. 이 함정은 방향이라는 좌표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장 잘 통한다. 같은 키워드를 공유한다는 표면적 정합성이 방향의 차이를 가린다.

셋째, 병치된 두 항의 교환이다. 보기나 지문이 ‘A하는 한편 B하려는’ 구조로 두 방향의 진술을 한 문장에 압축할 때, 출제자는 작품의 한 장면을 잘못된 항에 귀속시킨다. 보기를 두 항으로 분리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읽으면 어느 항이 어느 장면을 받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이 함정에 대한 방어는 보기를 만났을 때 항의 수를 의식적으로 세는 일이다. 한 문장 안에 몇 개의 운동이 들어 있는가. 그 각각은 무엇을 받는가.

이 셋은 모두 같은 원리의 변주이다. 표면적 키워드 일치에 속아 깊은 차원의 좌표(비유 여부, 방향, 항의 분리)를 놓치는 일. 정답을 고르는 자는 키워드 너머의 좌표를 매번 새로 측정해야 한다.

다음 세트로 가져갈 것

선지를 읽을 때 명사보다 술어와 부사에 먼저 멈춘다. ‘처럼’은 비유를 비유로 묶어두는 한국어의 자물쇠이다. ‘심화’, ‘해소’, ‘완화’, ‘강화’ 같은 방향 술어는 정반대 단어가 같은 자리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상대화’, ‘탐색’, ‘환원’ 같은 비평 술어는 보기의 어느 항에서 왔는지 매번 추적해야 한다. 명사는 양쪽 진영이 공유할 수 있지만 술어는 진영을 가른다.

보기를 만났을 때, 보기가 한 문장으로 두 운동을 압축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하는 한편 ~하려는’, ‘~과 함께 ~을 추구하는’, ‘한쪽으로는 ~ 다른 쪽으로는 ~’ 같은 접속 구문은 항이 둘이라는 신호이다. 작품의 어느 장면이 어느 항을 받는지 명시적으로 표시한 다음 선지를 검토한다.

서사 단위 사이의 관계를 묻는 문항에서는 ‘이 단위가 저 단위에 대해 무엇을 하는가’를 동사로 답한다. 강화한다, 약화한다, 해소한다, 심화한다, 예비한다, 부정한다, 재진술한다. 동사가 정해지면 선지의 동사와 비교하기 쉬워진다. 동사가 흐려지면 선지의 그럴듯한 어휘에 휘말린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한 가지 더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의 진짜 동기는 표면의 그럴듯한 동기보다 평범하지 않은 자리에 있다. 노파가 성경을 안고 있는 이유로 가장 그럴듯한 것은 신앙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신앙이 아니다. 시험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답이 진짜 답이 아닌 일이 흔하다. 어디에 그것을 가장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한 줄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그럴듯함의 자기장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빠른 길이다. 노파가 “나는 성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라고 말한 그 한 줄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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